시장 참여자를 아주 단순히 칼로 베듯 나누면 가격 설정자와 가격 수용자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설정자와 수용자라는 이름에서 보여지듯, 설정자는 상대방이 가진 수요곡선에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점을 선택할 수 있는, 어마무시한 파워를 갖는다. 반면에 수용자는 어떻게든 시장에서 설정된 가격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고시생이 되고 나서 느끼는 것은 내가 '수용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설정자'라고 할 수는 없었겠지만(나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니까), 적어도 나의 영역에서는 스스로 기준을 만들고 삶을 컨트롤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요즘은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해졌고, 또 앞으로 많은 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아무리 출제가 이상해도 두 시간만에 답을 써야하는데 이의 제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시험 문제도 수용해야 하고, 이렇게 많은 양을 언제 다 소화하나 싶지만, 내가 선택한 일이라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이다. 그래도 이정도는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얼마전에는 생각보다 '불합리한' 일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수용자'의 삶이라는 점을 알게 되어서 조금 우울했다.
모의고사가 나오는데, 선생님이 예전에 출제했던 문제를 그대로 내고, 예시 답안도 이미 수험가에 돌고 있는 상태라, 많은 학생들이 그냥 복사를 했다. 그리고 그대로 쓴 학생들은 좋은 점수를 받고 상위권에 랭크되고, 스스로의 답안을 쓴 사람들은 예시답안과는 어긋나기 때문에 점수가 낮아졌다. 물론, 예시 답안이 내 답안보다 낫다는 것은 자명하지만, 생각보다 불공정한 일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분명 나는 잘 썼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점수는 그렇지 못했다. 괜히 우울했다. 생각해보면, 지금 단계에서 좋은 답안을 그대로 써보는 것 역시 좋은 공부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만, 나름 납득할 만한 다른 답안이 정답에서 이탈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낮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느꼈다.
나는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또 이러한 기준을 가진 선생님이나, 이러한 행위를 하는 학생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이또한 '받아들여야 하는' 무언가가 되었다. 내가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순간 월권이 될 것이니까. 다시 생각해보면, 이렇게 하나하나 받아들여가는 과정이 수험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누군가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지만, 채점자들은 우리의 답안지만 볼 것이고, 그 노력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다면 불합격할 것이다. 다소, 억울할 수 있는 이 싸움에서 수험생들은 항상 수용해야 한다. 또 생각해보면, 앞으로 이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세상에 조금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일들은 아주 많을 터, 그때마다 수용자가 될 수는 없지만 많은 것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또한 삶이기도 한 것 같다.
그런데, 수용자가 되는 것의 즐거움도 있다. 물론 불합리한 것을 수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힘든 것도 수용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힘들지가 않다. 나는 매일 6시 30분에 깨서 저녁 10시 30분 정도에 집에 들어오는데, 이렇게 쳇바퀴 굴러 가듯 집-학원을 반복하는 삶이 힘들지 않을 리 없다. 그렇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소소한 행복들이 아주 큰 행복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얼마전에는 하루 공부를 쉰 적이 있었는데, 평일 낮에 카페에 앉아서 여유롭게 크림 커피를 마시는 일이 이렇게 행복한 일인지는 처음 알았다. 여유를 '만끽'한다는 말을 몸소 체험했달까.
또 하나의 '장점'이 있다면, 끊임없이 스스로에 대해 고민한다는 점이다. '설정자'로서 자만하는 일보다는, '수용자'로서 겸손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깨닫는 것도 있고, 또 나의 부족함도 보인다. 이러한 부족함이 보이고, 그리고 그를 고치는 순간 나는 공부를 한 셈이다.
수용자로 겸손히 살되 기죽지 않고, 또 불의까지 수용하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심지가 아주 굳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결국 답안을 베껴쓰지는 않기로 했다. 내가 납득이 가지 않는 답안을 복사해서 좋은 점수를 받아봤자, 나에게 납득되지 않는 것들은 머리에 남을리도 없기 때문이며, 또한 나의 논리가 왜 틀렸는지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날리는 셈이니까. 하지만,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매주 올라오는 점수표와 명단에 크게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즉,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외부의 자극에 굴하지 않는 어떤 신념이 필요한 것 같다.
수험을 다시 하면서 느끼게 된 것은 참 사람이 겸손해진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항상 '잘'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좀 거만했던 것 같기도 한데, 이제는 소위 '쪼렙'으로 밑바닥부터 올라가야 하는 신분이 되니 다시 겸손해졌다. 구도자적 자세로 수험을 대할 계획은 없었지만, 겸손하게 살면서 배우는 것도 참 많고, 앞으로도 많으리라 생각이 된다. 지금 내가 고3 시절을 회상했을 때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고, 오히려 열심히 노력했던 기억만 남는 것을 통해 유추해본다면, 이후의 내가 지금을 돌아볼 때 힘들었다는 것보다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고 회상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보내고 있는 시간이 미래의 나에게 그렇게 기억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생각한다.
늦은 시간에 적어보는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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