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

외교관에 대하여

dongohdongoh 2022. 6. 3. 02:03

고등학교 때 목표는 단 하나였던 것 같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 그것 때문에 열심히 공부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일 수 있지만, 수시 입학을 위해서 한 과를 정하고, 또 그것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출하는 생활기록부가 필요했다. 나는 역사를 잘했고, 특히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을 참 좋아하기는 했지만 역사가가 되고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대학교에서 정치외교학과나 경제학과를 꼭 복수전공해야지!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던 것 같다. 

 

무튼 그를 위해서 매해 생기부에 써낼 장래희망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되었다. 딱히 갖고 싶은 직업은 없었고, 설마 대통령이 되고싶다고 한다고 한들 중간단계 없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겠나... 생기부 작성 요령에 따르면 그 장래희망은 나의 희망학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것이어야만 했다. 그래서 적당히 역사와 내 취향과 여러가지들을 타협해 낼 수 있는 직업이 필요했다. 

 

외교관이 떠올랐다. 그래서,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내 장래희망 칸에는 아마 (확인해보지는 않았으나) 외교관이 적혀있는 것 같다. 

 

막상 대학교에 입학하고 나니 열심히는 살았는데 방향 없이 열심히 살았다. 학교에서 하라는 공부는 일단 열심히 했고 좋은 학점을 얻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학점이 중요하다는 로스쿨, 그런데 로스쿨 공부는 취향이 아닌 것 같았다. 고시를 하기에는 왠지 모르게 학점이 아깝다는, 다소 교만한 생각이 들었다. 무튼 그러한 고민과 많은 학업부담과, 과외와, 또 많은 것들에 심신이 너무 지쳤고 휴학을 했다. 

 

휴학을 하고 나서는 중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뭐라도 하나 특화된 인물이 되어야 먹고 살 길은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중국어를 1년간 (사실상 시험공부만 했으니 3달 정도) 공부했다. 만약 중드 시청도 중국어 공부 시간에 포함시켜준다면 세 달은 넘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가르쳐주는 게 좋아서 한국사 과외도 했었다. 어느 때는 친구가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을 치겠다길래, 그 친구랑 같이 공부하려고 나도 응시했다. 당연히 고등학교 때 공부한 게 있으니 수월하게 1급을 땄다. 22학년도에는 꼭 복학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21년도 11월 정도부터는 마음이 급해졌다. 문과생은 외국어를 잘해야 취업이 잘된다고 하길래 토익을 땄다. 

 

모종의 이유로 나는 system을 갈망하게 되었다. 체계가 전-혀 없는 무언가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자연히 아주 강력한 반작용이 일어 완벽한 체계가 필요해졌다. 고민 끝에 나는 고시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휴학 때 내가 따놓은 자격증들이 고시 응시 요건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고시를 할 생각이 없었는데 그러한 자격 요건들을 갖추어 가고 있었다는 것은 참 놀라웠다. 

 

뭔가 유퀴즈에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친한 동생이 이야기해줬다. 우연이 모여서 어느 것을 완성해 나가고 있는 것 말이다. 물론, 고시를 붙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참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스티브 잡스가 그랬던 것 같은데, connecting dots라고. 내가 그냥 했던 모든 행동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길이 되어가고 있었다.

 

2개월 동안 허둥지둥 준비했던 1차 시험은 운좋게 붙을 수 있었다. 물론 2차에 큰 기대가 없었기에 복학했다. 운좋게도 고시 과목이 모두 이번 학기에 열렸다. 학교 공부를 하는 시간이 안 아까워질 수 있어서, 나름 수월하게 병행할 수 있었다. 시험이 한 22일 앞으로 다가왔는데, 붙을 수 있다는 각오로 한 번 쳐보려고 한다.

 

다시 외교관이라는 주제로 돌아와서. 

사실 고시 공부는 많이 힘든 것 같다. 일단 뇌에 부하가 오기 시작했다. 금방 알았다가 또 한 달 있으면 까먹는 나의 기억력에 매일 놀라는 중이다. 그만큼 의지가 많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은 합격수기를 읽어보면, 자신이 왜 외교관이 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며 공부했다는 분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외교관이 되고 싶은 강력한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내가 이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 것도 내가 내린 순간의 선택들이 운좋게 성공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아직 외교관이 왜 되고싶은지는 모르겠으나, 공부를 하면서 이유를 찾아갈 것 같다. 그것 역시 '선'으로 연결하기 위한 '점'들을 찍어가는 과정이 될 것이다. 

 

제목은 외교관에 대한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내가 우연적으로 내린 선택들이 하나의 과정으로 수렴해간다는 사실이 놀라워서 이 글을 적기 시작했다. 삶은 정말 routine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명문고를 졸업하고 명문대를 나온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형적으로 선택하는 길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거시적인 이야기에 불과한 것 같다. 따지고 보면, 내가 고시를 준비하는 것도 참 전형적인 서울대 문과생의 모습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그 길을 선택한 계기, 그리고 그 과정을 밟아가는 마인드는 정형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미시적으로 보면 참 routine 밖의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삶은 계획대로 되지 않지만, 계획이 언제나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찍었던 모든 점들이 정말로 진공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에서 언젠가는 외교관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희미한 계획일지라도 하나 쯤은 갖고 있는 것이 북극성의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생각한다.